[허준열의 부동산 고발] "지금 아니면 좋은 호실 없습니다"
'호수 지정서' 한 장의 서명이 분양계약을 완성한다
허준열 부동산 전문 칼럼니스트 / 시사매거진 편집위원 / (전)프라임경제 편집위원 / ㈜투자의신 대표"지금 아니면 좋은 호실 없습니다."
모델하우스 현장에서 가장 흔하게 들리는 이 말은, 사실상 소비자의 판단력을 마비시키는 '심리적 압박 문장'이다. 많은 예비 수분양자들이 '좋은 호실'이라는 말에 혹해, 충분한 검토 없이 호수 지정서에 서명한다. 그러나 이 단 한 번의 서명이 수천만 원의 손실로 이어지는 경우가 적지 않다.
실제 상담 사례를 보면, 대부분의 피해자들은 '계약서' 대신 '호수 지정서'나 '청약신청서' 정도에 서명했다고 믿는다.
그러나 분양업체는 이 문서를 근거로 "계약이 성립됐다"며 계약해지시 위약금을 요구한다. 소비자는 ‘단순 예약’이라 생각했지만, 법적으로는 계약 의사표시로 해석될 여지가 있는 것이다. 이처럼 계약의 본질을 소비자가 명확히 인지하지 못한 상태에서 서명하게 만드는 구조적 함정이 현재의 분양 시장에 깊숙이 자리 잡고 있다.
더 큰 문제는, 이 과정이 종종 '방문판매법' 적용을 피해가도록 설계된다는 점이다. 많은 분양대행사들이 '홍보관'이라는 이름을 내세워, 사실상 소비자를 유인해 서명시키지만, 서류상으로는 방문판매가 아닌 '현장계약'으로 처리한다. 따라서 소비자가 계약 후 뒤늦게 허위·과장 사실을 인지하고 해지를 요구하더라도, 방문판매법상 청약철회권이 인정되지 않는다.
이 법의 사각지대 속에서 수많은 피해자들이 "계약금 포기" 또는 "위약금 납부"를 강요받는다.
분양 피해 상담을 하다 보면, 단순히 법적 분쟁의 문제가 아니라 정보 비대칭의 심각성이 드러난다. 분양상담사는 분양 영업의 전문적 지식과 정보, 세련된 마케팅 기술로 무장해 있지만, 소비자는 현장에서 그들의 즉흥적인 설명에 의존한다.
심지어 일부 분양상담사는 계약만 하면 잔금을 납부하기 전 중간에 "프리미엄 붙여 책임지고 전매해 주겠다" 그러니 잔금도 필요 없다는 식으로 명백히 허위 정보를 전달한다. 그 순간 소비자는 이미 계약서보다 말에 속게 된다.
이제는 소비자에게 '계약 전 숙려권'을 보장하는 제도적 장치가 필요하다. 자동차나 보험처럼 일정 기간의 숙려 시간을 의무화 하는 시스템 말이다. 이런 시스템은 단순히 분양 피해를 줄이는 차원을 넘어, 부동산 시장 전반의 신뢰 회복에도 기여할 수 있다.
부동산은 단순한 상품이 아니라, 한 가정의 미래를 담보로 한 약속이다. '좋은 호실'이라는 말에 흔들리지 않으려면, 소비자는 반드시 계약 전 모든 서류의 법적 의미를 확인해야 하며, 국가는 더 이상 '계약 자유'라는 이름으로 불공정한 분양 행태를 방치해서는 안 된다. 결국, 진짜 좋은 호실은 지금이 아니라, 충분히 생각한 다음에 선택한 호실일 수 있음을 명심해야 한다.








